고속철 기술 7: 철도 신호 시스템, 시속 300km 열차는 왜 신호등을 보지 않나 (폐색·ATC·TVM·LZB·ETCS·KTCS-2)

자동차는 앞차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열차는 그럴 수 없습니다. 쇠바퀴와 쇠레일 사이의 마찰은 고무 타이어와 아스팔트보다 훨씬 작고, 열차는 수백 톤에 이릅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열차가 앞에 멈춘 열차를 눈으로 봤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그래서 철도는 처음부터 「보고 멈추기」가 아니라 「미리 알고 멈추기」로 안전을 지켜 왔습니다. 그 장치가 신호 시스템입니다. 연재 「고속철 기술 비교」 일곱 번째 편에서는 앞 열차와의 간격을 지키는 원리, 그리고 고속철이 선로 옆 신호등 대신 운전실 화면을 보는 이유를 따라갑니다. 지난 편 철도 궤간 이야기가 선로의 폭을 다뤘다면, 이번 편은 선로 위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 이야기입니다.

핵심 요약

  • 철도 신호의 기본은 선로를 구간(폐색)으로 나누고 한 구간에 열차 한 대만 들이는 것입니다. 앞 구간이 비어야 진행 신호가 켜집니다.
  • 시속 300km 열차는 멈추는 데 수 km가 필요해 기관사가 신호등을 보고 반응하기엔 늦습니다. 그래서 허용 속도를 운전실 화면에 바로 보내는 차내 신호를 씁니다.
  • KTX 경부고속선은 프랑스 TVM 430으로 개통했고, 우리나라는 LTE 무선 기반 한국형 신호 KTCS-2를 개발해 일반선부터 적용하고 고속선 도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재 「고속철 기술 비교」 전 8편

  1. 1. 동력집중식과 동력분산식
  2. 2. KTX 세대별 차량
  3. 3. 일본 신칸센
  4. 4. 프랑스 TGV
  5. 5. 독일 ICE
  6. 6. 궤간 이야기
  7. 7. 신호 시스템 (지금 보는 글)
  8. 8. 자기부상열차 (공개 예정)

시간 간격에서 공간 간격으로

초기 철도는 시간 간격으로 열차를 보냈습니다. 앞 열차가 떠나고 몇 분이 지나면 다음 열차를 출발시키는 방식입니다. 앞 열차가 고장으로 멈추면 뒤 열차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고, 추돌 사고가 잦았습니다. 역무원이 깃발과 손짓으로 신호를 주던 시절입니다.

해법은 선로를 일정한 길이의 구간으로 나누고, 한 구간에는 열차 한 대만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간을 폐색(block)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 중반 전신이 보급되자 구간 양 끝의 역이 전신으로 「열차가 구간을 빠져나갔다」고 확인한 뒤에야 다음 열차를 들여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간격을 지키는 방식의 시작입니다. 영국에서는 1889년 아일랜드 아마(Armagh)에서 큰 사고가 난 뒤 여객 철도에 폐색 방식을 의무화하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레일이 열차를 알아보는 법: 궤도 회로

사람이 확인하던 일을 기계가 맡게 된 계기는 궤도 회로입니다. 1870년대 미국에서 실용화된 이 장치는 구간의 두 레일에 약한 전류를 흘려 둡니다. 구간이 비어 있으면 전류가 신호 장치까지 흘러가 「비어 있음」으로 읽힙니다. 열차가 들어오면 쇠바퀴와 차축이 두 레일을 이어 전류를 가로채고, 장치는 「열차 있음」으로 판단합니다.

이 방식에는 철도 안전의 핵심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전선이 끊기거나 전원이 나가도 전류가 오지 않으니 결과는 「열차 있음」, 곧 정지입니다. 고장이 나면 위험한 쪽이 아니라 안전한 쪽으로 기울도록 만드는 것, 이를 페일 세이프(fail-safe)라고 합니다. 철도 신호 장치는 거의 모두 이 원칙 위에 설계됩니다.

신호등의 색이 말하는 것

폐색 구간과 신호 (모식도)구간 1구간 2구간 3구간 4구간 5진행진행주의정지앞 열차뒤 열차 →한 구간에는 열차 한 대만. 앞 열차가 있는 구간 입구는 정지, 그 앞은 주의허용 속도멈춰야 할 지점차내 신호: 운전실 화면에이 곡선 아래 속도만 허용곡선을 넘으면 열차가 스스로 제동 (거리는 비율만 나타냄)
고정 폐색과 색등식 신호(위), 차내 신호의 제동 곡선(아래) (퀘스트피아 직접 작성 모식도)

폐색 구간 입구마다 선 신호기는 그 앞 구간의 상태를 알려 줍니다. 가장 단순한 3색 신호에서 빨간색은 「앞 구간에 열차가 있으니 멈춤」, 노란색은 「바로 앞 구간은 비었지만 그다음 구간 입구가 정지이니 속도를 줄여 대비」, 초록색은 「앞으로 두 구간 이상 비어 있음」입니다. 노란 신호가 필요한 이유는 제동거리입니다. 빨간 신호를 처음 보는 순간에 멈추기 시작하면 늦기 때문에, 한 구간 전부터 미리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일반 철도에서는 이를 더 잘게 나눠 진행·감속·주의·경계·정지 같은 여러 단계의 신호를 씁니다. 단계가 많을수록 열차는 앞 열차와의 거리에 맞춰 속도를 촘촘히 조절할 수 있고, 같은 선로에 열차를 더 많이 넣을 수 있습니다.

시속 300km에서 신호등이 소용없는 이유

이 체계는 시속 100km대 열차에는 잘 맞습니다. 고속철에서는 세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생깁니다.

첫째, 제동거리입니다. 자동차 바퀴는 고무가 노면을 움켜쥐지만, 열차는 매끈한 쇠끼리 닿아 있어 세게 제동하면 바퀴가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열차의 감속은 승용차의 비상 제동보다 훨씬 완만합니다. 감속을 초당 약 1m/s²로 잡으면 시속 300km(초속 약 83m)에서 멈추는 데 약 83초, 거리는 약 3.5km가 필요합니다. 실제 값은 차량, 선로 기울기,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수 km」라는 규모는 같습니다. 기관사 눈에 보이는 거리보다 훨씬 깁니다.

둘째, 보고 반응할 시간입니다. 초속 83m라면 500m 앞의 신호기를 알아본 순간부터 그 앞까지 6초 남짓입니다. 비나 안개, 터널 출구의 눈부심이 겹치면 색을 잘못 읽을 위험도 커집니다.

셋째, 사람의 실수입니다. 아무리 숙련된 기관사도 피로와 순간의 착오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시속 300km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고속철은 신호를 운전실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선로가 열차에 「지금 이 지점에서 허용되는 속도」를 직접 보내고, 운전실 화면에 그 값이 표시됩니다. 열차가 허용 속도를 넘으면 장치가 스스로 제동을 겁니다. 이것이 차내 신호와 자동 열차 제어(ATC)의 기본 생각입니다. 기관사는 여전히 열차를 운전하지만, 위험한 속도로 달릴 수 없게 기계가 울타리를 쳐 주는 셈입니다.

나라마다 다른 답: ATC·TVM·LZB·ETCS

방식 처음 쓰인 곳 열차에 정보를 보내는 길 특징
신칸센 ATC 일본 도카이도 신칸센 (1964년) 레일의 궤도 회로 신호 세계 첫 고속철과 함께 출발. 선로변 신호기 없이 운전실 속도 표시
TVM 300·430 프랑스 TGV 남동선 (1981년)·북부선 (1993년) 레일의 궤도 회로 신호 구간마다 목표 속도를 단계로 표시. KTX 경부고속선도 TVM 430으로 개통
LZB 독일 고속 운행 구간 (1970년대부터 확대) 선로 사이에 깐 케이블 루프 앞쪽 수 km의 정보를 연속으로 받아 제동 곡선 계산
ETCS 레벨 1 유럽 각국 선로의 발리스(전자 표지) 지점마다 정보를 받음. 선로변 신호기와 함께 씀
ETCS 레벨 2 유럽 각국 고속선·간선 철도 전용 무선 통신 무선으로 이동 허가를 받아 선로변 신호기 없이도 운행 가능
KTCS-2 우리나라 일반선부터 철도 전용 LTE 무선(LTE-R) 한국형 국산 신호. ETCS 레벨 2와 호환을 목표로 개발

신칸센 ATC: 처음부터 운전실 신호

1964년 도카이도 신칸센은 시속 210km로 개통하면서 선로 옆 신호기를 아예 두지 않았습니다. 레일의 궤도 회로가 구간마다 허용 속도를 나타내는 신호를 보내고, 운전실 속도계 옆에 그 값이 켜졌습니다. 열차가 그 값을 넘으면 자동으로 제동이 걸렸습니다. 초기 방식은 속도를 계단처럼 단계적으로 낮추는 것이었고, 이후 열차가 앞쪽 정보를 받아 부드러운 곡선으로 감속하는 디지털 ATC로 발전했습니다. 신칸센의 역사는 신칸센 편에 있습니다.

프랑스 TVM과 KTX

TVM은 프랑스어로 「선로에서 기계로 전송」이라는 뜻의 줄임말입니다. 1981년 TGV 남동선에 TVM 300이, 1993년 북부선에 개량형 TVM 430이 쓰였습니다. 선로를 일정 길이의 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에서 열차가 지켜야 할 목표 속도를 운전실에 숫자로 보여 줍니다. 앞 열차가 가까워질수록 숫자가 단계적으로 내려가는 방식입니다. 2004년 개통한 KTX 경부고속선은 TGV 기술을 들여오면서 이 TVM 430 신호를 함께 채택했습니다. TGV 이야기는 TGV 편에서 다뤘습니다.

독일 LZB: 선로 사이의 케이블

독일의 LZB는 두 레일 사이에 케이블을 깔고 일정 간격으로 엇갈리게 꼬아 두는 방식입니다. 열차는 이 케이블과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앞쪽 수 km에 걸친 허용 속도와 목표 지점을 미리 받습니다. 덕분에 열차가 스스로 제동 곡선을 계산해, 계단식보다 매끄럽게 속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ICE가 시속 200km를 넘어 달리는 구간에서 오랫동안 이 방식을 썼습니다. ICE 이야기는 ICE 편에 있습니다.

유럽 ETCS: 나라마다 다른 신호를 하나로

유럽 열차가 국경을 넘으면 나라마다 다른 신호 장치를 모두 실어야 했습니다. 국제 열차 운전실에 신호 장치가 여러 개 들어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것이 ETCS(유럽 열차 제어 시스템)입니다. 레벨 1은 선로에 놓인 전자 표지(발리스)를 열차가 지나갈 때 정보를 받고, 레벨 2는 철도 전용 무선망으로 관제 센터와 연결되어 「어디까지 가도 된다」는 이동 허가를 계속 받습니다. 레벨 2에서는 원칙적으로 선로변 신호기가 없어도 됩니다. 그 너머에는 고정된 구간 대신 앞 열차의 실제 위치를 기준으로 간격을 움직이는 이동 폐색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선택: KTCS-2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철도 신호 핵심 기술을 수입했습니다. 고속선은 프랑스 TVM 430, 일반선은 ETCS 레벨 1을 바탕으로 한 ATP 같은 외국 방식을 들여왔습니다. 신호 장치가 노선마다 다르면 차량에도 여러 장치를 실어야 하고 유지 보수도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국가 연구 과제로 개발한 것이 한국형 열차 제어 시스템 KTCS입니다. 그중 일반선과 고속선용인 KTCS-2는 철도 전용 LTE 무선망(LTE-R)으로 열차와 지상 장치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ETCS 레벨 2와 같은 개념으로, 호환성을 갖추도록 개발되었습니다. 2018년 무렵 연구 개발과 인증을 마쳤고, 2020년대 초 전라선(익산~여수엑스포)에서 처음 상용 운행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LTE 기반 열차 제어를 실제 영업에 쓴 첫 사례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고속선 적용도 준비 중입니다. 경부고속선에 KTCS-2를 도입하는 설계가 진행 중이고, 이후 호남고속선과 수서고속선으로 넓히는 계획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고속선 신호를 바꾸는 일은 매일 수백 편이 다니는 선로에서 진행해야 하므로 일정은 바뀔 수 있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국가철도공단과 운영사 발표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선 신호로 바뀌면 선로변 장치가 줄어 유지 보수가 쉬워지고, 열차 간격을 더 좁혀 같은 선로에 더 많은 열차를 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신호에 대한 오해 몇 가지

「고속열차는 자동으로 달린다」는 말은 반만 맞습니다. 우리나라 고속열차는 기관사가 직접 가속과 제동을 조작하고, 신호 장치는 허용 속도를 알려 주고 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합니다. 무인 운전은 일부 도시철도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신호가 고장 나면 열차가 마음대로 달린다」는 반대입니다. 페일 세이프 원칙에 따라 신호가 끊기면 열차는 멈추거나 아주 낮은 속도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신호 장애로 열차가 줄줄이 늦어지는 것은 이 원칙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간격은 넓을수록 안전하다」는 말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격이 넓으면 선로를 놀리는 것이 됩니다. 좋은 신호 시스템은 제동거리를 정확히 계산해 안전을 지키면서도 필요한 만큼만 간격을 둡니다. KTX가 출퇴근 시간에 몇 분 간격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이 계산 덕분입니다.

창밖으로 신호를 찾아본다면

KTX를 타고 고속선을 달릴 때 창밖을 보면 일반 철도에서 흔한 색등 신호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선로 옆에 숫자와 기호가 적힌 작은 표지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습니다. 구간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입니다. 열차가 기존선으로 넘어가 포항·여수·목포 쪽으로 들어가면 다시 색등 신호기가 나타납니다. 한 열차 안에서 두 종류의 신호 세계를 오가는 셈입니다.

다음 편은 연재의 마지막 이야기로, 바퀴 없이 떠서 달리는 열차, 자기부상열차를 다룹니다.

가늠해 보기

가늠 비교
시속 300km = 초속 약 83m 1초에 축구장(약 105m) 길이의 약 80%를 지남
감속 약 1m/s²일 때 제동거리 약 3.5km 축구장 약 33개를 이은 길이. 멈추는 데 약 83초
승용차 시속 100km 급제동 약 55m (감속 약 7m/s² 가정) 고속열차 제동거리는 이보다 약 63배 김
500m 앞 신호기를 본 순간부터 시속 300km에서는 6초 남짓이면 신호기 앞에 닿음
감속이 절반(0.5m/s²)이면 제동거리는 두 배인 약 6.9km. 제동 성능이 신호 간격을 정함

우리나라 철도 신호 사업은 국가철도공단에서, 신호 기술 연구는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유럽 표준 신호 ETCS는 유럽철도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가철도공단 → 한국철도기술연구원 → 코레일 (한국철도공사) → 유럽철도청 ERTMS·ETCS 안내 →

자주 묻는 질문

Q. 폐색이란 무엇인가요?

선로를 일정한 구간으로 나누고 한 구간에 열차 한 대만 들어가게 하는 방식입니다. 앞 구간이 비어야 다음 열차가 들어갈 수 있어 추돌을 막습니다.

Q. 고속선에는 왜 색등 신호기가 없나요?

시속 300km에서는 제동거리가 수 km에 이르고 신호기를 알아볼 시간도 몇 초뿐이라, 기관사가 눈으로 보고 반응하기엔 늦습니다. 그래서 허용 속도를 운전실 화면에 바로 보내는 차내 신호를 씁니다.

Q. KTX는 시속 300km에서 얼마나 가서 멈추나요?

차량과 선로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수 km가 필요합니다. 감속을 약 1m/s²로 잡아 계산하면 약 3.5km, 시간으로는 1분 20초 남짓입니다.

Q. KTCS-2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가 개발한 열차 제어 시스템으로, 철도 전용 LTE 무선망으로 열차와 지상 장치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전라선에서 처음 상용화되었고 경부고속선 등 고속선 도입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Q. 신호 장애가 나면 왜 열차가 멈추나요?

철도 신호는 고장이 나면 안전한 쪽, 곧 정지로 기울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확인이 끝날 때까지 열차는 멈추거나 아주 낮은 속도로만 움직입니다.

Q. ETCS 레벨 1과 레벨 2는 무엇이 다른가요?

레벨 1은 선로에 놓인 전자 표지를 지날 때마다 정보를 받고 선로변 신호기와 함께 씁니다. 레벨 2는 무선으로 관제 센터와 계속 연결되어 이동 허가를 받으므로 선로변 신호기 없이도 운행할 수 있습니다.